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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사역

수원저녁_(베트남아웃리치_간증문) 변*숙

  • 작성일자 : 2019.08.29
  • 조회수 : 1172

나에게 베트남은 아픔 그 자체여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다시는 뒤돌아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힘든 상처받은 곳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그러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가 아닌 베트남으로 부르셔서 베트남에서 받은 상처로 15년 동안이나 부둥켜안고 울고 있던 나에게 아웃리치 기간 내내 아버지께서 하신 일들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음을 알게 하셨다.

베트남 팀, 九ONE의 샘물 팀은 묶여진 그 날부터 이가 빠진 그릇처럼 한 구석이 비어있는 허전한 팀이었다. 九ONE의 샘물이란 팀 이름은 九명이 한 마음 되어 주님과 함께 가서 영생하는 구원의 샘물을 흘려보내자는 뜻으로 지어주신 이름이었건만 2명의 자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아웃리치에 참가하지 못함을 알려 와서 팀원 전체의 마음이 어려워 며칠 동안은 아무 것도 못하고 가만히 기도만 하다가 비행기 예약을 시작으로 겨우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주님은 우리 팀에게 계속적인 기도의 은혜를 부어 주셨는데, 목요일과 토요일에 팀 모임을 계속하였고, 짝 기도의 은혜를 주셔서 기도와 삶을 나누며 식사도 같이하는 시간도 허락하셨다. 매일 밤 9시에는 아웃리치를 위한 기도, 10시엔 결단하지 못한 2명의 자매를 위한 기도로 이끌어 주셨고 중보를 담당하신 자매님은 매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기도하도록 은혜를 주셨다.결국 2명의 자매님은 함께 하지 못했고 7명만이 떠나게 된 아웃리치, 너무 힘들고 야속한 준비 기간이었지만 그로 인해 팀이 기도로 주님 안에서 하나 되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안전 장치였음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7월 27일 토요일, 휴가가 절정에 달하는 극성수기가 시작되는 날이라 하여 19시 25분 비행기임에도 우리 팀은 교회에서 1시에 출발하여 2시 20분에 공항에 도착하여 생각보다 너무 한산한 공항에서 수화물을 여유 있게 보내고 환전한 달러를 찾고 많은 시간들을 즐겁게 보내는 중에 시간이 지연됨을 알게 되었다. 몇 차례의 출발 시간 지연에도 우리 팀원들은 출국장 앞에 앉아서 SUM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여고생처럼 깔깔거렸고 손가락만으로 연습하고 촬영된 동영상을 보고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 빨리 가야한다고 시간을 보지도 않았고 늦게 가도 조급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은혜였음을 23시 50분에 이륙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9시간 30분을 머물렀던 것이다. 드디어 도착하여 만난 유한중 선교사님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는 너무 많이 기다리셨음을 알게 되었다.새벽 3시에 도착한 호치민의 푸미흥은 예전에 우리 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이어서 낯설진 않았지만 구석구석 아픔이 되살아나 아무도 모르게 아파왔다. 주일 저녁에 만난 김덕규 선교사님은 베트남의 선교사님 중 1세대 선교사로서 어떻게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지를 보여주시며 말씀해 주셔서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자고함을 꺾어주셨고 다시 주님께로 행하는 자세로 바꿔 주셨다.

7월 29일 월요일, 몇 시간을 기다려 날아간 플레이쿠 공항에서 1시간 떨어진 꼰뚬 지역이 우리가 섬기려 하는 소수민족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29일 화요일 아침, 3명의 공안과의 만난 후에 우리는 꼰뚬의 공인 교회인 닥룽교회에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배우고 교육 받는 꼰뚬 지역의 청년들과 주일학교 교사들 50여명을 만나 SUM으로 찬양하고 교제하였다.이후로 위험해 보이는 낭떠러지 옆의 터덜거리는 길을 1시간 30분을 달렸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님을 더 깊이 만날 것만 같은 기대감이 앞섰고, 예전엔 길조차 제대로 나있지도 않은 길을 목숨 걸고 오토바이로 다녀가셨을 선교사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고 한 분 선교사님을 통해 행하신 주님의 일하심을 목도하게 되어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꼰빙에오 교회에 도착하자 교회의 처마에 매달린 큰 북을 치는 청년을 보며 가슴 떨리는 사역을 시작했다. 북소리에 온 산족들이 교회로 모여들었고 30여 명의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출력하며, 다른 한 편에서는 색종이를 접어 액자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손을 잡고 얼싸 안았다. 꼬질꼬질한 손으로 색종이 조각을 부여잡고는 손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들여다보는 아이의 눈빛에서 짠한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이어지는 비누방울 놀이에 그 천진난만한 웃음이라니…… 이 모습을 주님도 보고 싶으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깊은 곳에도 주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숨겨두시고 찬양받으시고 예배 받으시는 주님을 어찌 찬양 안 할까? 그곳은 단기 선교 팀이 처음 들어간 기념비적인 날이라는 말씀을 듣고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선교 팀을 보내셔서 깨우고 배우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더욱 품고 기도하게 되었다.

31일 닥라이 교회에서의 사역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3국 접경지대를 방문하여 복음이 쉼 없이 흘러가기를 기도하였다. 8월 1일, 개정된 종교법이 시행되는 첫날이어서 복음 전파가 더욱 편만히 이루어지길 기도하여 긴장하여 방문한 야라이 족이 사는 랑짱교회, 그러나 방문부터 공안이 지키고 있어서 긴장 속에 우리는 두 곡의 SUM으로 영광 돌리며 찬양하는데 왼쪽으로 보았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슬 퍼런 공안의 모습이 보여서 묘한 분위기였다. 종이접기를 하는 동안에도 공안은 우리의 여권을 넘기며 사진을 찍었고 계속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우리를 압박하였고 야라이족 지도자들의 얼어붙은 모습은 선교사님과 우리들을 가슴 아프게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사역을 마치고 다녀가지만 이후에 공안에게 시달릴 이 지역 지도자들과 주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속상하여 몇 끼를 식사도 못하셨다. 어떤 마음으로 이들을 품고 이 땅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셨는지 가슴이 저려왔다. 이어서 남쪽으로 다시 이동한 붕따우 지역의 픅탕교회는 고아원이 있는 교회였다. 부모가 있어도 방치하여 교회에서 거두어 양육하면 부모가 데려가서 일을 시키는 가슴 아픈 아이들이 사는 교회였다. 단돈 몇 푼 도와주는 것이 선교가 아님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딜 가도 주님은 우리를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리 먹이셨고 환영 받게 하셨다. 2년 넘게 베트남에 살았어도 돈이 없어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대할 때마다 왈칵 눈물이 올라와 맘껏 즐길 수가 없었다. 15년 전, 가슴 터지도록 비전을 품고 도착한 베트남에서 하나님은 나의 욕심을 보게 하셨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나의 욕망을 철장 권세로 산산조각 내시며 하나님의 비전으로 채워가셨고 복을 담을 그릇으로 오랫동안 빚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인도하신 JDS를 통해 일그러진 나의 믿음을 어루만져 주셨고 말씀을 곡해한 부분도 바로잡아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나의 기도를 의지했던 가여운 나의 신앙생활도 일일이 점검해 주셨다.그리고 인도하신 베트남에서 비로소 왜 그 큰 비전을 주셨는지, 왜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 왜 지금인지를 단 번에 깨닫게 하시면서, 그가 찾는 이 없어 울고 계신 주님이 다시금 나를 부르심을 보게 되었다.

작년부터 남편의 사업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더욱 가시화 되면서 구체화되어가고 있다. 이 시기에 베트남으로 부르신 이유를 더욱 묵상하며 산족의 아이들과 고아원의 아이들을 우리 회사로 연결하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반응할 차례다. 주님 영적 분별력을 더해 주시고 재정의 돌파를 허락하시며 묵은 기도를 응답해 주시어 부르시는 곳으로 가게 하소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